<스포일러 주의>
작년 여름 극장에서 본 <퍼시픽 림>을 다시 봤다. 마침 오늘 생일선물로 주문받은 블루레이가 도착해서. 오랜만에 봐도 역시나 재미있다.
개봉 당시 <퍼시픽 림>은 호불호가 매우 갈리는 영화였다. 적어도 내가 본 감상평들 가운데 '그냥저냥 볼만 했어요'는 없었던 것 같다. '완전 최고!'와 '완전 쓰레기...'는 많았지만.
평이 갈리는 이유는 아마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가 매우 명확하고 그를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희생했기 때문일 것이다. <퍼시픽 림>은 '거대 로봇 vs 거대 괴수'라는 목표만을 성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가 크게 비주얼과 스토리로 구성된다고 한다면, 비주얼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스토리를 포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볼 관객들 역시 명확해진다. 스토리가 빈약하더라도 길예르모 델 토로가 만들어낸 거대 로봇과 괴수의 전투만으로 환호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관객들이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랬다.
예거와 카이주의 대격돌. 로봇이나 괴수가 등장했던 다른 어떤 영화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압도적인 비주얼이 상영시간 내내 가득하다. 거대함이 부딫히는 전투 장면은 방정맞지 않고 웅장하다. 내지르는 주먹의 속도는 빠르지 않지만, 오히려 그 느린 속도에 긴장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퍼시픽 림>의 매력이다. 또다른 로봇 영화의 대표인 <트랜스포머>와 비교했을 때, 이 매력은 더욱 빛난다. <트랜스포머>의 로봇들은 예거에 비하면 오히려 '아기자기'하고 '방정맞다'고 해야 할 정도다.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는 스토리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적어도 뼈대는 있다. 그저 거대 로봇이 괴수와 싸우는 것을 보고싶다면, 그냥 전투장면만 모아놓은 영상으로 대신해도 된다. <퍼시픽 림>은 영화이기 때문에, 멋진 전투장면들을 이어붙일 정도의 스토리는 존재한다. 어찌보면 스토리는 전투 장면을 잇기 위한 접착제 정도밖에 못 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미덕인 것을 어찌하랴.
네이버 기자 평론가 평점을 보면 송경원씨가 이렇게 썼다. '크기는 정의다. 양덕은 진리다.' 그렇다. 크기는 정의다. 그리고 덕중의 덕은 양덕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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